은행코드 90, 모두의 스마트폰에 지점을 열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우리는 ‘왜 이래야만 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묻고 행동하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들에 힘입어 세상은 조금씩 변한다.
‘창구가 꼭 있어야 할까?’, ‘공인인증서는 필수적인 보안 수단일까?’, ‘은행이 100% 모바일을 추구할 순 없는 걸까?’.
몇 년 전만 해도 허황된 주제였을 법 한 질문들은 2015년 중반 들어 현실성을 띄게 됐다. 우리나라 50대 이하 인구 중 90% 이상이 스마트폰을 쓸 정도로 모바일 인프라가 빠르게 확산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서비스와 기기가 편의성과 성능을 높여가며 경쟁하고 있었고, ‘핀테크(FinTech)’라는 화두가 떠올랐다. 금융 혁신의 필요성도 공감대를 높여갔다.
2001년도, 2008년도에 두 차례나 추진됐지만 무산된 인터넷 전문은행 설립 논의도 다시 일어났다. 정부는 2015년 6월 18일 ▲소비자 편의성 제고 ▲은행 산업 경쟁 촉진 ▲신성장동력 창출을 위해 ICT기업 등 혁신성 있는 경영 주체의 금융 산업 진입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컨소시엄을 주도하다
그 무렵의 카카오는 합병 PMI(Post-Merger Integration. 합병 효과 극대화를 위한 조직 융합 과정)를 마치고 새로운 도전 과제를 찾고 있었다. 보험회사와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경험을 쌓은 대니얼(Daniel)이 경영회의에서 안건을 꺼냈다.
“얼마 전 금융위에서 인터넷 전문은행 도입 계획을 발표했어요. 우리가 도전해보면 좋겠습니다.”
반기는 사람은 적었고 ‘우리가 왜?’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대표적인 인가 산업인 금융, 그중에서도 규제 강도가 가장 높은 은행업에서 ‘카카오다운 속도감을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앞서 출시한 카카오페이가 결제의 혁신을 도모하며 500만 사용자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도 결정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대니얼은 다른 관점을 토대로 설득에 나섰다. 라이선스 비즈니스는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며 ‘제1 금융권’인 은행을 하게 되면 다른 금융사업뿐 아니라 금융 외의 비즈니스와 연결에 있어 매우 유리한 기회를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꼭 해야 할’ 이유보다 적었다. 카카오에 ‘모바일뱅크 TF’가 꾸려졌다.
1992년 평화은행 설립 이후 23년 만에 새로운 은행을 탄생시키는 일인 만큼 치열한 예비 인가 경쟁이 예상됐다. 대니얼이 말했다.
“컨소시엄 참여 기업을 구성하는데 깊은 고민을 거듭했어요. 카카오가 경험한 적 없는 금융업을 해 본 기업, 삶의 기반 인프라로 확장할 수 있게 하는 기업을 참여시키려고 동분서주했습니다. 한 자문 교수님이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경험하신 사례를 말씀해 주셨어요. 국내에서 높은 신용도를 토대로 원활한 금융 생활을 했지만, 미국 내 경제 활동 데이터가 없어서 신용카드 발급에 애를 먹던 차에, 아마존에서 전공 서적을 구매한 기록들이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됐다고 하시더군요. 이런 게 바로 기존 은행들이 제공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 아닐까 상상하며 각 업계에서 활약하던 기업들을 주주사로 초빙했습니다.”
2015년 8월 한국투자금융지주가 50%의 자본을 대고 카카오, KB국민은행, SGI서울보증, 우정사업본부, 넷마블, 이베이, 스카이블루(텐센트), YES24 등이 참여한 카카오뱅크 컨소시엄이 구성됐다.
#은행업의 재해석
10월 1일, 예비 인가 신청 서류를 접수한 카카오뱅크 컨소시엄이 사업계획을 준비하며 가장 집중한 화두는 ‘업의 재해석’이었다. 오랜 시간 고착된, 그래서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불편함 들을 먼저 추렸다.
09시~16시 사이에 창구를 방문해야만 하는지, 오래 기다려야 할 경우 사용하는 ‘반차 휴가’가 너무 아까운데 해결할 수 없는지, 공인인증서보다 간편하면서도 강력한 보안 수단은 없는지 등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TF 멤버들은 제기된 모든 의문을 모아 카카오뱅크의 본질부터 명확히 했다. 일상과 동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은행이 아닌, 나의 삶에 늘 붙어 있는 ‘디지털 돈 통’이라는 지향점이 도출됐다.
이런 업의 재해석과 본질 정의의 이면에는 절박함도 있었다. 자본력과 인력, 영업력, 업력 등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강력한 경쟁자인 기존 은행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니얼은 “기존 은행들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한다’는 개념이었다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점에서 경쟁력과 차별화를 이끌어내야 했습니다. 지점 하나 없이 앱을 알려야 하는데, 디지털 돈 통의 쓰임새나 혁신성이 기대치보다 낮을 경우 살아남기 어렵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11월 29일, 예비 인가 법인 두 곳이 정해졌다. 2015년 당시 미국에서 20여 개, 유럽은 30여 개, 일본에서는 8개의 인터넷 전문은행이 영업 중이었고, 중국도 두 개 사업자를 인가한 다음이었다. 길게는 20년 늦게 출발하는 우리나라 인터넷 전문은행의 모습은 무엇이 다를 지에 관해 관심이 집중됐다.
#14개월간의 여정
예비 인가를 득한 카카오뱅크 컨소시엄은 곧장 본인가 획득을 위한 준비 법인 설립 절차에 돌입했다. 이듬해 1월, 참여 기업 임원들이 모여 진행상황을 공유한 뒤 정관 승인과 이사회 개최, 법인 등기와 사업자등록 등의 과정이 이어졌다. 인재 영입과 그룹웨어 준비, 인사제도와 규정 마련, 감사 선임 등 신생 기업이 챙겨야 할 것들이 수두룩했다.
인터넷 은행이 아닌 100% 모바일 은행을 향한 기술적 준비도 함께 진행됐다. ‘레거시(Legacy) 제로’에서 출발하는 만큼 참고할 것은 없었다. 기획자들과 개발자들은 작곡가가 새로운 음악을 만들 때 혹시 모를 표절을 할까 두려워 노래 감상을 중단하듯 창조에 몰입했다.
“보통의 모바일 비즈니스 기업들에겐 앱 다운로드가 큰 장벽입니다. 일단 설치하게 되면 사용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죠. 은행 앱은 내려받은 뒤 신분증을 꺼내고 약관을 접하는 등 다양한 허들이 존재해요. 한 뼘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이 모든 어려움들을 자연스럽고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살피고 또 살폈습니다”. 대니얼의 회고다.
모바일 뱅킹에서 당연했던 모든 것들을 낱낱이 쪼개 처음부터 쌓아 올렸다. 몇 단계 인증을 통과해 진입했는데 서비스를 실행할 때마다 비밀번호를 한번 더 입력하게 하는 것이 옳은지, 비대면 실명 확인을 위해 역 이체 방식을 활용하면 어떨지 등 크고 작은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구성원들은 '이 정도면 기존 은행 앱들보다 낫다'는 자평을 가장 경계했다.
이 같은 모습은 카카오뱅크의 개발 문화에서도 관찰된다. “자회사 혹은 외주사가 주어진 과제를 소화하는 보통의 은행들과 달리, 카카오뱅크의 개발자들은 각자의 기술 역량을 기반으로 재량권을 충분히 부여받습니다.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어 내려고 더 많이 고민하죠. 망작을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과 명작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의 결괏값이 다른 이유입니다. 시간이 흘러 기술 트렌드에 맞는 새로운 코드가 나올 때 그 역할을 명예롭게 넘겨줄 수 있는 명작을 만들고 싶었어요”. 초기 단계부터 개발자로 일해온 제이케이(JK)의 이야기다.
구성원의 40%에 달하는 개발자들은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해 카카오뱅크의 근본적 차별화를 구현하고 있다. 오픈소스나 리눅스, x86을 도입해도 기존 금융권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자신감, 어떤 의도를 갖고 왜 그렇게 설계되었는지, 그리고 모든 이슈들과 해결 과정들을 내재화 한 경험은 독특한 무형 자산이다.
제이케이는 “PC 기반의 인터넷뱅킹, 그리고 스마트폰 등장 이후 대세가 된 모바일 뱅킹에 이어 어떤 폼팩터(Form factor)가 등장할지 예상할 수 없지만,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금융 분야에서 카카오뱅크는 가장 빠르고 유연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바지 입어도 회의는 잘 됩니다만
카카오뱅크를 설명하는 데 있어 ‘기업 문화’는 빼놓지 말아야 할 요소다. 매일 아침 ‘풀 수트’차림으로 출근하던 은행원들이 카카오뱅크로 이직한 뒤 후드티와 운동화 차림 일색인 풍경에 놀랐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졌다.
직급 제도 없이 영어 이름으로 편하게 소통한다거나 킥보드를 타고 사무실 안을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 역시 ‘카카오 혈통’ 다운 수평 문화의 단편이다. 외부 기관을 방문하거나 행정 당국의 수장이 방문할 때면 이런 분위기는 의식적으로 ‘필터링’되기 마련이지만, 카카오뱅크는 그렇지 않았다. 덕분에 2016년 7월 카카오뱅크 직원들이 한국은행을 회의차 방문했을 때, 8월 금융위원장이 카카오뱅크 준비 법인을 방문했을 때 여름철 다운 시원한 복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부분 회사에 존재하는 임원용 명당자리인 ‘코너 오피스(corner office)’가 없다는 사실도 카카오뱅크 구성원들에겐 당연한 일이다.
이런 기업 문화는 결과가 아닌 필요조건이자 원인이었다. 인터넷·모바일 업종과 금융권, 그리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이 모여 전에 없던 비즈니스를 하나하나 쌓아 올릴 때 공유와 충돌, 그로부터 형성되는 신뢰와 모두의 헌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용자들에게 권위적이지 않은 서비스는 이렇게 일상으로부터 탄생했다.
#'꺾기’도, 가입 유도도 없이 로켓 성장
2017년 4월 5일, 카카오뱅크는 3개월의 심사를 거쳐 본인가를 받았다. 은행코드 90, 주식회사 한국카카오은행(2020년 6월 카카오뱅크로 법인명 변경)이 탄생했다. 정식 출시를 앞두고 관계자 및 주주사 임직원 1600여 명을 상대로 한 클로즈 베타 운영이 진행됐다. ‘무에서 유’를 쌓아 올린 그간의 노력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긴장감이 고조됐다.
공인인증서가 필요 없다는 놀라움,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는걸 그동안 왜 아무도 하지 않았는지’ 허탈해하는 반응이 먼저 관찰됐다. 모든 관계자들이 가장 희망적으로 여긴 부분은 계좌 개설 속도였다. 평균 7분, 가장 빠른 사람은 2분 만에, 그리고 조금은 모바일 환경이 낯설 법한 50대들도 10분이면 비대면으로 신규 계좌를 만들 수 있었다. 대니얼은 “지금도 모든 은행 앱을 한데 놓고 실행해보면 순수 네이티브 앱으로서 카카오뱅크가 지닌 탁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린 세대일수록 더 잘 느끼는 부분이죠. 다른 은행들의 모바일 앱이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다를 때니 이용자들은 확연히 다르다는 걸 강하게 느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2017년 7월 27일, 카카오뱅크는 컨소시엄 구성 후 23개월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디지털 돈 통’의 힘은 모두의 예상을 앞질렀다. 서비스 시작 하루 만에 30만 명이 계좌를 열었다. 앞서 시작한 인터넷 전문은행 사업자가 45일이 걸려 도달한 수치였다. 출범 13일 차에는 계좌 개설 고객이 200만 명을 넘어섰다. 긴 시간 응축된 구성원들의 땀방울이 다가올 미래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폭발적인 트래픽에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예상치를 넘는 대출 신청 때문에 일주일 만에 증자에 나서야 했다. 카카오프렌즈를 담은 체크카드는 한 달 가까이 걸려서야 손에 쥘 수 있었다. 혹자는 이런 현상을 카카오라는 브랜드에 관한 호감, 새로운 서비스에 대한 호기심에 힘입은 ‘찻잔 속 태풍’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다른 한 켠에서는 ‘카뱅’이 카카오뱅크의 줄임말이 아닌 ‘카카오뱅크가 일으킨 빅뱅’이라며 무한한 가능성을 점쳤다. 3년 6개월이 지난 지금, 중간 성적표는 ‘빅뱅’에 수렴하고 있다.
일관되게 관찰되는 점은 목적으로서의 새로움이 아닌, 집요한 개선 의지가 만들어낸 혁신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상담 챗봇, 26주 적금, 모임통장, 중금리 대출, 카카오뱅크mini 등 그간의 행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업의 재해석’을 통해 일궈낸 결과물들은 군더더기 없이‘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덜어내고 쓸모와 편의를 충족한다. ‘꺾기’도, 상품 가입 유도도 없이 이뤄낸 성과다.
#뱅크보다 뱅킹, 수익보다 트랜젝션
50대 이상 시니어층에게 은행은 ‘내 돈을 안전하게 맡겨놓는 곳’이었다. 반면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젊은 층일수록 ‘내 돈 통’을 편리하게 활용하는 점을 중요시했다. 카카오뱅크 등장 이후 은행을 평가하는 잣대는 세대를 넘어 ‘편리한 돈 통’으로 동질화되고 있다.
2020년 말 기준 대한민국 경제활동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1,360만 명이 카카오뱅크에 계좌를 개설했다. 카카오뱅크mini와 모임통장, 내신용정보 등을 통해 계좌는 없지만 카카오뱅크를 경험한 사람까지 합치면 그 수는 1,540만 명에 이른다. 50대 침투율 증가세는 타 연령대에 비해 가파르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중후반기 성장세를 시니어층이 이끈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흐름을 통해 카카오뱅크가 얻은 가장 큰 성과는 플랫폼 비즈니스에 대한 자신감이다. 비교적 우량한 신용대출 부결 고객들을 제2 금융권과 연결시켜주는 연계대출, 비대면 증권 계좌 개설, 라이프스타일 기업과 협업해 만들어낸 ‘뱅킹 커머스’ 등은 전에 없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서비스 론칭 이후에는 이용자들의 페인 포인트를 찾아내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데이터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쌓이고 있어서다.
놀랄만한 발명도 몇 년이 지나면 평범한 일상이 된다. 카카오뱅크가 보여준 놀라움들 가운데 일부는 이제 ‘하품 나는 일상’이 됐다. 지난 2월 2일 열린 프레스톡(기자간담회)을 통에서 대니얼이 제시한 카카오뱅크 혁신 방향성에서도 부지불식간에 다가올 새로움 들을 예감할 수 있다.
“어떤 기술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고객의 입장에서 직관적으로 알기는 좀 어려울 것입니다. '편하다', '빠르다'라는 느낌만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혁신보다도 그렇게 손끝으로 느껴지는 편리함이야말로 금융혁신의 척도가 아닐까요.”
뱅크보다 뱅킹, 수익보다 트랜잭션이 중요한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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